‘뭉우리돌’은 둥글둥글하게 생긴 큰 돌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거의 쓰이지 않는 이 말은, 김 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뚜렷한 상징으로 박여있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 구는 일제 순사로부터 “지주가 전답에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례”라며 고문과 함께 자백을 강요받을 때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다짐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더 이상 뭉우리돌이라는 단어가 일상에서 쓰이지 않듯이 겨우 100여년 밖에 지나지 않은 ‘나라 잃은’ 역사를 우리의 일상과 오관은 감각하지 못한다.
여행사진가로 세계 일주를 하던 청년 사진가 김동우가 문득 그와 같은 사실을 자각하고 부끄러웠던 것은, 인도 뉴델리 레드포트(Red Fort Complex)에서였다. 무굴제국의 요새로 알려진 레드포트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사 중 빛나는 성과를 거둔 ‘인면전구공작대’가 훈련을 하던 곳임을 우연히 전해들은 그는, 중국 상해 임시정부를 주축으로 한 독립운동이 어떻게 이토록 먼 나라 인도와 연관되어있는지 의아했다.
의문을 쫒다보니 그동안 몰랐던 100년 전 역사의 여러 면면과 함께 유럽에서 중미까지 예상을 뛰어 넘는 범위로 독립운동유적지들이 산재해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는 세계 일주를 멈췄고, 그때부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현장들을 홀로 찾아 헤매는 여정을 시작했다. 여행사진은 자신이 아니어도 누군가 할 수 있지만, 이 기록은 누군가 대신해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홍범도 장군이 활약하던 연해주에서부터 사후에 한 기의 묘로 남은 카자흐스탄까지, 장군이 넘어야했던 7,000km를 사진가 김동우도 따라 넘었다. 독립운동을 하다 서른셋 나이에 처형된 ‘김알렉산드리아’가 처형 직전에 마지막 소원으로 우리나라 13도를 그리며 13발자국을 걸었던 러시아 하바롭스크의 ‘죽음의 계곡’ 무심한 바위 위를 김동우도 걸었다.
멕시코와 쿠바를 오가며, 독립운동자금을 임시정부로 보냈던 애니깽 농장의 노동자 ‘임천택’의 딸 ‘마르타 임’과 ‘이윤상’의 딸 ‘레오나르 이’를 비롯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을 만났다. 2017년 4월부터 2018년 11월까지, 우즈베키스탄에서 네덜란드•미국•멕시코 등 9개국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흔적들을 발로 쫒고 사진과 글로 기록한 것이다.
사진가 자신이 ‘뭉우리돌’ 정신이 없었다면 하기 어려웠을 이 지난한 작업이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해외 9개국의 독립운동 유적과 후손들을 집대성한 이 최초의 성과물 <뭉우리돌을 찾아서>는 3.1혁명 100주년을 맞아, 희미해져가는 우리 역사의 기억을 ‘기록’으로 분명히 할 것이다.

저자 소개
김동우 Kim Dongwoo
필름 현상을 맡겨보니 사진이 한 장도 나오지 않은, 어설펐던 첫 촬영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대학에선 학보사 활동으로 사진과 인연을 이어갔다. 신문사 기자로 일하면서부터는 차츰 사진과 멀어졌다. 그러다 여행에 마음을 홀딱 빼앗겼고, 잊고 지낸 사진을 다시 하게 됐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세상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한 게. 그 후 몇 번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했다. 상식이 통하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회를 꿈꾸며 잃어버리고 잊혀진, 바래고 물 빠진 것들을 카메라에 담는데 관심이 많다.
작가노트: 김동우
일제강점기는 내게 ‘슬픔’이란 명사뿐이었다. 구체적 내용이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철저하게 배제된 이야기들, 불과 100여 년 전 나라 잃은 역사이질 않나. 줄곧 흐리멍덩하게 과거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인도를 여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뉴델리 레드포트가 우리 광복군이 영국군과 함께 훈련하던 장소라고 했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를 뒤져보니 유럽에서 중미까지 내 예상을 뛰어 넘는 범위였다. 그 전까지 우리 독립운동사를 너무 좁은 의미로 이해하고 있던 셈이다. 간질간질한 무엇인가가 가슴에서 퍼져 나갔다.
세계일주를 하고 있던 난 계획을 송두리째 변경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 현장을 찾아 헤매는 여행의 시작이었다. 가는 곳마다 독립운동가 후손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대사관에 연락도 해보고 이도 여의치 않으면 한인회를 찾아갔다. 한국인 선교사에게 도움을 청할 때도 많았다. 세계 곳곳에 보석처럼 박힌 그들을 찾아내는 일은 인내를 필요로 했다. 촬영은 그 다음 문제였다. 기다림 끝에 연락이 닿아도 말이 통하지 않았다. 어렵사리 통역을 구해 그들을 만나면 하나 같이 따듯하게 날 안아주었다.
이야기를 하다 말고 김치를 꺼내와 내 입에 넣어준, 차 한 잔으론 부족해 밥상을 내온 할아버지•할머니들. 그들은 대한민국의 오늘을 뿌듯해 했고 보람 있어 했다. 민족이 무엇인지, 자신의 뿌리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확고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 그들을 통해 독립운동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고 있었다.
뭉클한 만남 이후에는 사적지를 찾아 나섰다. 지도가 정확치 않거나 주소가 틀리게 표기된 곳이 많아 헛걸음은 예삿일이었다. 그중에서도 이름 하나, 사진 한 장 들고 독립운동가의 묘지를 찾는 건 꽤나 어려운 과정이었다. 그만두고 싶을 때쯤 찾던 비석을 발견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러다 표지판 하나 없이 터만 남아 있거나 완전히 풍경이 바뀐 장소에 닿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를 듣는 것처럼 멍하니 초점이 흐려졌다. 애써 이해하고 싶고 한발 더 다가가고 싶어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장소들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카메라를 옮겨 봐도 공간을 제대로 해석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고백하건대 이 작업은 내게 역부족이었다. 때론 감정 소비에 지쳐 집에 돌아갈 이런저런 구실을 찾기도 했다. 그럼에도 작업을 놓을 수 없었던 건 역설적이게도 최소한 돌아갈 구실을 찾는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찾아 헤맨 그들은 돌아갈 나라조차 없지 않았나.

나도 몰래 감정이 불나방처럼 춤추는 걸 애써 진정시켜야 했던, 역사 공부를 손에서 놓지 못하게 했던 무수히 많은 밤을 지내고 보니 독립운동과 관련된 중국•인도•멕시코•쿠바•미국•러시아•네덜란드•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등 9개국을 여행 한 뒤였다. 한국에 돌아와 행려병에 걸린 사람처럼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들끓던 감정이 좀 가라앉았으면 했다. 조금 편하게 농담을 섞어가며 이야기하고 차분하게 작업 내용을 복기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너무 식지 않았으면 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일본과 만주에 남아 있는 독립운동사를 찾아 훌쩍 떠나야 하니까. 왜 이 감정의 칼춤 앞에 또 서려는지 모르겠지만….
이 작업은 우리 스스로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역사를 소환하고 증거하고자 했던 시도다. 우리가 오롯이 기억하고 살펴야 할 과거이자 현재 말이다. 작업 시작은 우리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했지만, 끝은 독립운동에 대한 진심으로 갈음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