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석 동원재팬 법인장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단순히 한 기업인의 경영 스토리가 아니라 한 사람이 어떻게 성장하고 무대를 넓혀가는지에 대한 긴 여정을 마주하게 된다. 그의 삶은 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 교사였던 아버지는 매일 저녁 식탁에서 “오늘은 무엇을 했니?”라고 물었다. 단순한 대화였지만, 하루를 돌아보고 설명하는 습관은 그를 평생 학습자로, 또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외교관을 꿈꾸며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지만, 1988년 민주화의 열기가 뜨거운 캠퍼스는 이상보다 혼란을 더 크게 안겨주었다. 그가 기대했던 낭만은 보이지 않았고, 거리 시위와 강제적인 참여가 이어졌다. 답답한 나날 속에 신촌의 작은 영화관에서 본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가 그의 인생을 바꿨다. 미국 대학의 자유로운 토론 문화에 충격을 받은 그는 곧바로 교환학생을 신청해 테네시주의 메리빌 칼리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일본 학생들과 교류하며 일본어에 눈을 떴고, 귀국 후 일본학을 전공하면서 동아시아의 시야를 넓혀갔다.
1998년 IMF 위기 속에서 예상치 못하게 동원에 입사하며 그의 진로는 크게 전환되었다. 본래 외교관을 꿈꾸던 그에게 식품업계는 낯설었지만, 오히려 그 낯섦이 현장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수출, 영업, 물류, 마케팅, 디자인까지 스스로 발로 뛰며 익혔고, 특히 2004년부터 2005년까지의 삿포로 경험은 “소비자는 눈앞의 제품만이 아니라 신뢰를 산다”는 깨달음을 남겼다. 시식 행사장에서 소비자와 직접 마주하며 얻은 이 교훈은 이후 그의 철학으로 자리 잡았다.
2010년 동원재팬을 법인화했을 때, 자본금은 2천만 엔, 직원은 몇 명뿐이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7년 연속 적자라는 시련이 닥쳤다. 창업주 김재철 명예회장의 호된 질책을 받은 뒤, 그는 결심했다. 대표라는 이름에 안주하지 않고 영업·회계·물류·디자인을 스스로 맡아 회사의 모든 과정을 몸으로 체험했다. 그렇게 버틴 끝에 2018년 드디어 흑자 전환에 성공했고,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는 라볶이가 코스트코에서 대히트를 기록하며 매출은 수백억 원 단위로 성장했다.
그의 철칙은 단순하다. “컨셉 없는 맛은 없다.” 라볶이는 글꼴과 설명서, 조리 경험까지 세밀하게 설계해 소비자에게 단순한 음식이 아닌 체험을 선사했고, 이후 로제·짜장 등 다양한 버전으로 확장됐다. 고추참치는 15년 동안 꾸준히 공을 들이며 유튜브, 음식점과의 협업을 통해 ‘먹는 장면’을 넓혔다. 양반김은 20년 넘게 소비자와 함께하며 원가 폭등 시에도 무리한 가격 인상을 자제했다. “한국 식품이 일본에서 뿌리내리려면 최소 10년은 걸립니다. 중요한 건 꾸준함입니다.”
이런 꾸준함은 인재 육성에서도 드러난다. 동원재팬의 직원은 5명 남짓이지만, 모두가 큰 프로젝트를 맡는다. 신입사원에게도 대형 이벤트와 SNS 운영을 맡기고, 실패조차 포트폴리오로 남도록 한다. 그는 말한다. “사람의 가치는 직함이 아니라 경험이 결정합니다. 무엇을 했는지가 곧 시장 가치입니다.”
브랜드를 상품이 아닌 문화로 바라보는 시각도 인상적이다. BTS 진의 ‘슈퍼참치’와 연계한 한정판 전략, 신주쿠 3D 고양이 광고, 인스타그램에서 소비자와 직접 소통하는 방식은 브랜드를 문화적 체험으로 승화시켰다. 동시에 일본 각지의 고등학교에서 김밥 만들기 체험을 지원하고, K-POP 콘테스트를 후원하며 젊은 세대가 한국과 만나는 접점을 넓히고 있다. 그는 “정치는 식지만 아이들의 손은 따뜻하다. 한일은 생활로 연결됩니다.”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젊은 세대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실패는 가장 값진 자산입니다. 회사는 무대를 줍니다. 그 무대에서 춤춘 시간이 곧 당신의 포트폴리오가 될 겁니다. 직함이 아니라 성취를 좇으세요.”
하기석 법인장의 여정은 실패를 자산으로 만들고, 현장을 무대로 삼아 도전을 이어온 기록이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무대 위에서 춤추듯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다.

인터뷰: 송원서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