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최근 임원들을 대상으로 “삼성다운 저력을 잃었다”며 강하게 질책하고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를 촉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하반기 반도체 부진과 관련해 “위기임을 인정하고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자”고 주문한 데 이어, 이번에는 생존의 문제로까지 발언 수위를 높였다.
17일 재계에 따르면 이 회장은 최근 열린 삼성 임원 대상 세미나에서 “삼성은 죽고 사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 경영진부터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회복 기미를 보이지 못하고 실적 악화가 심화되자, 조직 내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이에 삼성은 지난달 말부터 삼성전자를 포함한 전 계열사의 부사장 이하 임원 2000여 명을 대상으로 ‘삼성다움 복원을 위한 가치 교육’을 진행 중이다.
이번 메시지는 고(故) 이병철 창업 회장과 고 이건희 선대회장의 경영 철학이 담긴 영상 상영 후 이어졌다. 영상에는 이재용 회장의 기존 발언과 함께 올해 초 신년 메시지로 준비했던 내용도 일부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이 회장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중요한 것은 위기 자체가 아니라 위기에 대처하는 자세”라며 “당장의 이익을 희생하더라도 미래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술의 중요성도 거듭 언급하며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 셋째도 기술”이라는 철학을 재확인했다.
이 회장이 이 같은 강경 메시지를 보낸 것은 단순한 실적 악화 때문만은 아니다. 삼성의 근본적인 경쟁력이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도체 사업은 범용(레거시) 메모리 수요 둔화와 고대역폭 메모리(HBM) 공급 일정 지연 등으로 시장 기대보다 낮은 성적을 기록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국내 증권사 18곳의 보고서를 종합한 결과 삼성전자의 올해 1분기 영업이익 예상치는 평균 5조3724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8.7% 감소할 전망이다.
더 큰 문제는 글로벌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입지가 점차 좁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삼성전자의 메모리 반도체(D램·낸드플래시),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등 주요 제품의 시장점유율이 일제히 하락했다. 특히 반도체 분야에서 SK하이닉스에 역전당한 데 이어, 중국 창신메모리 등의 저가 공세와 미국 마이크론 등의 기술 추격으로 ‘샌드위치’ 위기론이 현실화하고 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에서도 대만 TSMC와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이 회장이 ‘사즉생’의 각오를 강조한 이유다.
세미나에서는 외부 전문가들도 삼성의 위기 요인을 분석했다. 이들은 “남들보다만 잘하면 된다는 안이함에 빠져 실력을 키우지 못하고 있다”, “상대적 순위에만 집착해 질적 향상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등의 지적을 내놨다. 참석한 임원들은 총수가 직접 ‘삼성의 위기’를 언급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 임원은 “위기를 인정한 만큼 삼성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삼성은 임원들에게 각자 이름이 새겨진 크리스털 패를 전달하며 경각심을 높였다. 패에는 ‘위기에 강하고 역전에 능하며 승부에 독한 삼성인’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위기 극복을 위한 보다 능동적인 자세를 주문한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는 미래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연구개발(R&D)과 설비 투자에 대한 공격적 기조를 유지할 계획이다. 지난해 R&D에 35조 원, 설비투자에 53조6000억 원을 투입하며 역대 최대치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도 이 같은 전략을 이어갈 전망이다. 또 디바이스경험(DX) 부문 미래 신사업을 본격화하기 위해 기존 ‘신사업 태스크포스(TF)’를 정식 조직인 신사업팀으로 격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