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치바현의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한 정원은 얼핏 보기에 동화 속 그림 같다. 잉어가 노니는 작은 연못과 사방을 둘러싼 푸른 나무들, 그리고 온통 채광이 드는 유리창 사이로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심에 치바한인회 양미영 회장이 서 있다. 환하게 웃는 표정 뒤에는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그 이야기를 나누고자 직접 찾아 나섰다.
“1986년 11월 13일, 나리타에 내리다”
양미영 회장의 첫마디는 “일본에 처음 내린 날짜를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라는 것이었다. 1986년 11월 13일, 일본 땅에 도착했을 때 겪은 무서운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날 마츠도로 이동하던 중 납치되어 15일간이나 자유를 빼앗겼다. 일본어도 모르고, 의지할 이도 없었던 청춘의 일본 생활은 그렇게 극적인 긴장감 속에서 시작되었다.
“잊고 싶은 경험이지만, 그날과 그 기간을 잊는다면 제 과거 절반이 사라져버릴 것 같아요.”
납치 후 어렵게 빠져나온 뒤, 시부야에 있는 일본어 학교에 무사히 입학했다. 그러나 1년짜리 단기 여권밖에 받을 수 없던 시절이라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어려움이 반복됐다. 그 사이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되는데, 바로 “노래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화장품 회사 사장의 스폰서 지원으로 노래 연습을 하고, 킹레코드에서 데뷔 음반을 내기까지. 눈 깜짝할 새에 스타가 되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아니었지만, 그 과정 또한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제 남편을 만난 것도 영화 같았죠”
당시 캠페인성 무대와 앨범 활동을 시작할 무렵, 그녀에게 6개월간 끈질기게 ‘커피 한 잔’을 청했던 남자가 있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저 ‘오늘 아니면 평생 못 볼 수도 있으니 한 번만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한마디가 와 닿았다.
“지금 남편이죠. 왜 그렇게까지 저를 찾아다녔는지는 나중에 자서전을 쓰겠다고 했어요. 저도 자세히 공개하긴 좀 그렇지만, 도망 다니듯 둘이 야반도주를 해야 했던 때도 있었어요.”
가족과 주변의 반대, 뜻하지 않은 문제까지 겹쳐 둘은 아주 험난한 과정을 겪었다. 그 사이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7개월된 아이를 데리 고향에도 4년 만에야 겨우 들를 수 있었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남편은 “당신을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여성으로 만들고 싶다”며 악착같이 일에 뛰어들었다. 그 와중에 양 회장은 ‘시어머니 모시기’부터 집 나간 청소년 돌보기까지, 가족과 주위 사람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다. 20여 년 가까이 전업주부로 집과 자녀에게만 온 힘을 쏟다 보니 대인기피증이 생길 정도로 세상과 담을 쌓았다.
“외부 활동을 시작하고, 치바한인회와 만나다”
골프 연습장에서 샵을 하며 외부 활동을 시작하였고, 골프 대회 활동을 다니곤 했는데, ‘치바한인회’라는 조직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솔깃했지만 딱히 잘 알지도 못한 단체였다. 그런데 어느 날, 동경에서 열리는 골프 대회에 참가했을 때 만난 한인이 “치바한인회에 가입해 보라”며 추천을 했고, 양미영 씨를 곧 ‘수석부회장’으로 내정해버렸다. 정작 그녀는 ‘수석부회장’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명함을 받았는데, 거기 ‘수석부회장’이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이게 뭐지? 내가 뭘 어떻게 하는 거지?’ 했죠. 그런데 소문은 이미 ‘다음 회장은 양미영’이라고 나 있더라고요.”
결국 진짜 회장이 되어보니,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고 복잡했다. 회원 모집에서부터 각종 한인 행사, 다른 단체와의 교류까지 “내가 이렇게 사람 만나러 돌아다닌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정신없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여자 회장이면 어려운 일도 많지 않겠느냐, 특히 일본은 더 남성 중심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부정적인 시선을 무릅쓰고 “치바에서 한인회를 알리고 서로 돕고 봉사하는 조직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며 도전했다.
“지지미 부치고, 김장 담그며 한일 문화를 잇다”
그녀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일단 움직이자, 그리고 먹거리로 하나 되자”라는 것이다. 실제로 치바한인회가 주최하는 가장 대표적인 봉사·교류 활동이 바로 ‘지지미(전) 교실’과 김장 행사다. 일본 현지인들을 초청해 한국 음식을 함께 만들고, 서로 문화를 교류하는 장을 연다. 특히 김장 행사에는 이틀 동안 무려 300포기 가까운 배추로 김치를 담가내고, 즉석에서 겉절이며 총각김치를 만들어 맛보게도 한다.

“일본 분들이 ‘한국에도 딸기가 있어요?’ 라고 물으실 정도로 아직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분도 많더라고요. 그래서 하나씩 알려드리고, 또 우리가 일본 문화도 함께 배우고. 이런 게 진짜 교류죠.”
손도 많이 가고 돈도 만만치 않게 들지만, 김장한 김치를 지역 주민이나 취약 계층, 복지 시설 등에 기부하면서 치바한인회의 존재감을 알리고 있다. 덕분에 구청, 지역 사회 단체 등에서도 적극적인 협조와 관심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양 회장의 자랑이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힘, 그게 한인회의 존재 이유”
치바한인회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양 회장 스스로도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앞이 캄캄할 때도 있다”고 털어놓는다. 그래도 과거에 겪은 수많은 파란만장한 일을 떠올리면 “이 정도 일은 해낼 수 있다”는 용기가 솟는다고 한다. 무엇보다 든든한 것은 함께 뛰어주는 임원진과 회원들. 처음엔 ‘왜 회장직을 맡았냐’며 걱정하던 이들도, 이제는 식당 주방에서부터 행사 진행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재능을 살리고 있다.
“솔직히 두 번이나 앓아누울 정도로 체력적·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순간이 있었어요. 그래도 이왕 맡은 거 제대로 해보자, 봉사하고 싶다고 여기 모인 사람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죠. 모두가 함께하니 제가 못하는 걸 채워주시고, 한인회가 하나의 가족처럼 돌아가는 느낌이에요.”
그녀에게 한인회가 의미하는 바를 묻자, “처음엔 그냥 ‘좋은 사람 만나볼까’라는 마음이 컸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끼리 뭉쳐서 사회에 보탬이 되고, 또 서로 의지가 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참 좋아졌다”고 답한다.
“이제, 더 많은 이에게 손을 내밀고 싶어요”
양미영 회장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민망하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촌스럽다”라며 웃음을 짓곤 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생활전선에서 치열하게 버텨온 그의 발걸음은, 누구든 쉽게 할 수 없는 선택들이었다.
이제 치바한인회는 한일 관계가 조금 더 가까워지길 바라며, 일본 현지인에게 한국 문화를 전하고, 한국 교민들끼리 더욱 단합하는 역할을 이어갈 계획이다. “우리가 만들어 온 작은 노력들이 모여,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게 참 기쁨이다”라는 한마디가 그녀의 모든 열정을 설명해주는 듯했다.
수십 년 전, 낯선 일본 땅에서 납치로 시작했던 인생이 이제는 일본과 한국을 이어주는 끈이 되었다는 사실이 묘하다. 양미영 회장은 오늘도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전은 언제든 더 부치면 되고, 김치는 조금 더 담그면 된다”며 쿨하게 웃는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밝은 얼굴로 “내가 먼저, 기쁘게”라는 자세를 잃지 않는 그녀.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그녀의 근육이 되고, 결국 다른 사람들을 감싸 안는 무한 에너지가 되었다.
“일본 생활, 뉴커머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
다소 격정적인 과거사를 털어놓는 동안에도, 양미영 회장의 음성은 의외로 차분했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그는 이제 막 일본에 발을 디딘, 혹은 적응 문제로 고민하는 이른바 ‘뉴커머(newcomer)’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건네고 싶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습관이나 성격을 100% 그대로 가져오면, 일본에서는 안 통해요.
일단 한 발 물러서서, 낮춰서, 상대방 말을 들어줘야 해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머리를 숙이고 인사하는 작은 행동 하나가
나중에는 오히려 일본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는 큰 힘이 되거든요.”
그가 강조한 핵심은 ‘서로 다른 문화를 인정하고, 배우려는 마음가짐’이다. 잘난 척하거나 억지로 한국식을 강요하기보다는, 먼저 한 톤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고 웃으며 인사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괜히 ‘내가 한국에서는 이만큼 했는데’라는 자존심부터 앞세우면, 일본에선 벽이 생겨요.
어렵고 힘든 과정이 있겠지만,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일본 사람들도 마음을 열고 더 큰 존중을 돌려주더라고요.”
이미 30년도 훌쩍 넘는 세월을 일본에서 보내며, 회장 스스로 수없이 부딪치고 깨지며 체득한 노하우다. 그녀는 “내가 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길을 직접 걸었고 끝내 살아남았기 때문”이라며 웃는다. 낯선 땅에서 다른 문화와 섞여 살아가는 일이 쉬울 리 없지만, 그래도 “머리 숙이는 게 절대 지는 게 아니다” 라는 조언을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글 / 송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