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동포참여공모제를 통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 선발된 김익재 씨는 국제통상전략연구원에서 연구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그러나 원래라면 독일에서 통일학과 사회정치학을 한창 공부해야한다. 독일 유학생인 김 연구위원이 어쩌다 민주평통과 국제통상전략연구원에서 활발히 활동하게 된 걸까? 어떤 포부와 비전을 가지고 있는걸까? 김 연구위원을 만나서 그의 입을 통해 확인해보는 자리를 가졌다. 김 연구위원과의 인터뷰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해 보았다.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6년차 독일 유학생 김익재입니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 통일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는 사회정책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습니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북유럽협의회 자문위원, 국제통상전략연구원 연구위원으로도 활동 중입니다.
–독일로 유학을 가셨다고 했는데, 어떤 계기로 독일을 선택하게 되었는지요?
대학 시절까지만 해도 “대학원은 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었습니다. 그 찰나, 독일에서 사회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전공 지도교수님을 만나 뵙게 되면서 독일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독일에서의 유학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지도교수 본인께 박사학위를 주신 독일 지도교수님을 소개해 주셔서 만나 뵐 수 있는 기회도 있었는데, 여러모로 저의 20대에 가장 큰 영향을 주신 은인이십니다.
더군다나 제가 하고자 하는 분야가 사회정책이고 독일은 이 부분에 있어 상당히 앞서 있다는 것과, 무엇보다 별도의 등록금 없이 이른바 ‚공짜밥‘을 먹고 공부할 수 있다는 점 역시도 크게 와 닿았습니다.
–통일학을 전공했다는 부분이 눈에 띕니다. 어떻게 전공을 하게 되었는지요?
시작은 호기심이었습니다. 학부생 시절, 부전공이나 복수전공을 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때, 통일학부에서 학생을 모집하는데, 복수전공 등록금도 받지 않고, 매년 JSA와 일본에 있는 조선학교 탐방 기회까지 제공한다고 하니 지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통일학을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전국 통틀어 극소수라는 점도 한 몫을 했고요. 그렇게 시작한 통일학이 배우다보니 어느새 재미가 있었고, 통일학 학사학위를 함께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유학 중 힘든 일은 없었나요?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해외에서 거주해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언어’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독일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해야 했고, 독일어를 하지 못하면 하다못해 무엇 하나 사고 싶은 것도 사기가 힘든 그런 시간들이 힘들었지요. 하지만 대학원에 진학을 하고 독일 생활 연차가 쌓여 가면서 언어에 대한 힘든 감정은 누구나 그렇듯 조금씩 무뎌진 것 같습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까요.
–반대로 기억에 남는 일도 있을텐데요.
물론입니다. 혼자 외국에서 살게 되니 참 소박한 것에 행복을 느끼게 되더라구요. 처음 프랑크푸르트에 집을 구한 것부터 보훔에서의 생활 가운데 늘 물심양면 아끼지 않고 손자처럼 보살펴주시는 파독 교민 선생님들과의 시간까지 많은 시간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또한 제가 보훔루르대학교에 갓 입학하고, 제가 독일에 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신 학부 지도교수께서 제가 있는 지역으로 오셔서 일주일 정도 보훔부터 베를린까지 함께 다니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눈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유학생으로서 앞서 이야기한 민주평통, 국제통상전략연구원 등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계기가 있을까요?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내는 곳이 서부 루르지역의 보훔인데, 이 지역은 특히 옛날 파독 광부/간호사들께서 일을 하신 지역으로도 유명합니다. 현재까지도 많은 교민분들께서 거주를 하시는데, 한 교민 어르신께서 “민주평통에서 청년위원을 선발하는데 자네는 통일학도 같이 공부를 했으니 한 번 지원을 해 보는게 어떻겠나”하는 권유에 당시 처음 실시된 재외동포참여공모제를 통해 지원을 했고, 민주평통 자문위원으로 위촉될 수 있었습니다.
민주평통 자문위원으로 위촉이 되고 나니, 북유럽협의회 167명 통틀어 유일한 20대이자 최연소 자문위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윽고 2019년 워싱턴에서 열린 ‘민주평통 세계청년위원컨퍼런스’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워싱턴에 다녀올 수 있었고, 그 곳에서 세계 곳곳 다양한 일과 학업을 하는 많은 동료 청년위원들과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민주평통의 다른 청년위원께 국제통상전략연구원 연구위원 자리에 한 번 지원해 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아 지원을 했고, 연구위원으로서 위촉이 되어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유학생이기 때문에 쉽지 않다는 말 보다는, 잘 몰랐기에 쉽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도 민주평통부터 국제통상전략연구원까지 그저 평범한 한 명의 유학생으로 있었다면 알지 못할 정보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인터뷰의 주제가 바로 ‘독일 통일 30주년’인데요. 통일이라는 부분이 쉽지 않은 주제잖아요. 독일 통일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을 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통일’이라는 주제가 다루기 쉽지 않은 이유는, 정치 군사적으로 많은 이해관계들이 얽혀있고, 그만큼 이를 풀어나가는 과정 역시도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020년 10월 3일, 한국에서는 ‘하늘이 열린 날’이라는 개천절로 기념하지만, 독일에서는 ‘통일절(Tag der Einheit)’로서, 통일 30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또 다른 의미의 ‘하늘이 열린 날‘로 볼 수도 있겠지요.
공식적으로는 9월 5일부터 10월 4일까지 ‘EinheitsEXPO(통일엑스포)’라는 이름으로 ‘30 Jahre – 30 Tage(30년 – 30일)’을 테마로 열렸는데, 작년 행사는 브란덴부르크 주 포츠담시(Potsdam, Brandenburg)에서 개최되었고 이 행사 가운데 있는 상징물이 인상 깊었습니다.
바로 ‘Wir(우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 한 단어로 동서독이 이젠 더 이상 분단이 아닌 하나의 독일이라는 것을 한번에 대내외적으로 인식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막을 내리면서 독일은 소련의 동독, 미국/영국/프랑스 신탁통치 하의 서독으로 분리가 됩니다. 이외에 동독 지역 내에 있지만 베를린을 두고 다시 한번 동베를린(Ost-Berlin) 그리고 서베를린(West-Berlin)으로 분리가 되었습니다.
한반도의 상황과 비교해 보자면 100% 비교는 힘들겠지만, 개성시 안에 남측 관할과 북측 관할 개성시가 함께 공존한다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1989년 무너진 베를린 장벽 역시도 동서독을 가르는 국경이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동/서 베를린을 구분하는 장벽이 무너진 것이고요. 이듬해인 1990년에 이르러 독일은 통일을 맞이합니다. 그 이후 작년을 기준으로 독일 통일 30주년이 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주요하게 나오는 것이 바로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äherung)’로 대표되는 동방정책(Ostpolitik)입니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를 중심으로 한 과거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과의 화해정책인데요. 1970년 동서독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1972년 서독 헤센 주 카셀에서 있었던 ‘동서독 기본조약(Grundvertrag)’을 통해 서독은 동독에 통일까지 약 18년 간 1,044억 독일 마르크를 지원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동방정책의 성과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는데요. 여담으로 이런 동방정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빌리 브란트가 베를린 시장 재직시절 머물렀던 관사는 현 주독 대한민국 대사관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앞서 통일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의 자리에 아직 통일이 되지 않은 국가의 대사관저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독일이 통일이 되고 분단국가라는 이미지는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여파마저 한번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구동독과 서독 간의 임금 격차와 주요 기업 본사 소재지 등에 있어 많은 차이가 발생을 하고 있고, 매체와 조사 등에 따르면 일부 동독 시민들의 경우 그들 자신을 이른바 ‘2등 시민’이라 느낀다는 조사결과도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즉, 통일 이후를 생각하는 것 역시도 분단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독일 통일에 대해서 간략히 말씀을 해 주셨는데, 그렇다면 한국과 독일의 통일에 있어 차이점과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생각을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지요?
‘독일 흡수통일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 같이 독일은 서독에 의해 ‘흡수통일’된 것이 아닌, 동독 주민들이 통일의 주역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럽으로의 소풍(Paneuropäisches Picknick)’으로 완고했던 철의 장막이 무너지고 이 혁명은 이윽고 모든 동구권 국가들에 퍼지게 됩니다. 이후 1989년 9월 25일,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동독 시민 8천 여명이 모인 시위가 바로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을 이끈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동독월요시위(Montagsdemonstrationen 1989/1990 in der DDR(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입니다. 이후 매주 월요일마다 시위가 열렸고, 이윽고 1989년 11월 4일, 동독 수도 베를린에 100만 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민주화와 자유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열었고, 정부는 이를 더이상 막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닷새 후인 9일 저녁,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게 됩니다.
즉, 독일 통일은 흡수통일이 아닌 동독 시민들이 주역이 되어 이루어 진 것입니다.
둘째, 독일과 한반도의 분단은 그 원인과 양상 그리고 분단국가를 둘러싼 관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경우, 1, 2차 세계대전의 연이은 패전이 영토 분할 및 전쟁 배상금 그리고 분단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즉, 원인이 그들 내부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한반도는 그 양상이 다릅니다. 우리가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닌, 이른바 ‘20세기 최대의 대리전쟁’ 이후 분단된 국가라는 점이 그것입니다.
물론 독일과 한국의 통일 양상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저는 이 가운데 독일로부터 배울 수 있는 통일에 대한 교훈은 앞서 언급을 했듯 ‘접근을 통한 변화 (Wandel durch Annäherung)’ 그리고 ‘작은 발걸음 정책 (Politik der kleinen Schritte)’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당장의 통일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다가올 통일에 대한 준비는 해 둘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준비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이른바 ‘빅 딜(Big Deal)’을 통한 성과만큼이나 작지만 확실한 서로의 발걸음과 접근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독일의 경우 구동독의 영향으로 수도인 베를린 시에는 남북 대사관이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범구 전 독일 대사 재임 당시, 박남영 당시 북한 대사와의 만남, 남북 핸드볼 공동 개최 및 6.15 공동선언 행사 공동참석 그리고 베를린 장벽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통일정 등도 앞서 말씀드린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자 접근을 통한 변화의 예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향후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면?
앞서 말씀드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그리고 국제통상전략연구원의 일원 그리고 대학원생으로서 우선 박사학위 취득을 목표로 계속 나아갈 생각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하나 이루어 나가는 것에 성취를 느끼며 작게는 제가 소속된 집단으로부터 크게는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냉철한 머리’, ‘따뜻한 가슴’ 그리고 ‘부지런한 손과 발’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합니다.
분단 이후 지금까지 남북관계가 여러모로 경색과 완화의 경로를 반복하고 있습니다만 언젠가 우리가 맞이하게 될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 질 지는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향후 지금은 경색국면에 있는 남북교류, 경제협력 등의 분야와 이를 거시적으로 포괄하는 ‘통일’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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