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리자 샤흐릴 에펜디 압둘 가니 (H.E. Dato’ Shahril Effendi Abd Ghany) 대사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올해는 정말 논스톱이었습니다. 의장국의 무게가 이렇게 큰지 새삼 느끼고 있어요.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집니다.” 10월 중순, 짧은 인터뷰였지만, 그 사이로 2025년 말레이시아의 방향성이 또렷하게 보였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포용성과 지속가능성’, 그리고 실행을 위한 현장 감각이었다.
쿠알라룸푸르를 향한 동선, 사람을 향한 의제
말레이시아는 올해 아세안 의장국으로 ‘포용성(Inclusivity)’과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내걸었다. 샤흐릴 에펜디 압둘 가니 대사는 이 기조를 “사람 중심 성장을 지키면서 디지털·그린 전환으로 지역 격차를 줄이는 일”이라고 정리했다. 올 한 해만 300건이 넘는 회의·포럼이 이어졌고, 중장기 나침반인 ‘아세안 공동체 비전 2045’가 채택되었다.
“정상회의는 쿠알라룸푸르 도심에 힘을 모았습니다. 숙박·동선·경호 같은 보이지 않는 디테일이 성패를 좌우하니까요.” 준비에 대한 설명은 간단했지만, 그간의 분주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일본은 ‘실행의 파트너’
샤흐릴 에펜디 압둘 가니 대사는 일본을 “기술·그린에너지·디지털 포용의 핵심 파트너”라고 표현했다. 협력 주제는 구체적이다. 재생에너지 확대, 생물다양성 보전, 국경을 넘는 디지털 인프라가 논의 테이블에 올라 있고, 목표는 아세안 각국의 디지털 격차 해소다. ‘포용’이라는 추상적 단어가 네트워크, 규격, 인력으로 번역되는 순간이다.

사진: 파이낸셜뉴스 재팬
숫자로 보는 동맹의 두께
이 관계의 두께는 경제에서 확연해진다. 2005년 체결된 MJEPA(말레이시아‑일본 경제연대협정) 이후, 양국 협력은 양적 확대를 넘어 질적 고도화로 옮겨붙었다. 대사가 꺼낸 숫자는 인상적이다. 말레이시아 내 일본 기업 1,602개+, 일본 참여 제조 프로젝트 2,838건, 누적 투자 약 305억 달러, 고용 344,996명. “말레이시아는 일본 기업이 동남아로 뻗는 교두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역방향의 흐름도 있다. 말레이시아 기업들은 할랄 제품·서비스·에너지 분야에서 일본 내 존재감을 키우는 중이다. 공급망을 엮어 동북아·동남아를 잇는 허브로 자리 잡는 구상도 보인다.
성장의 설계도, 2030을 향해
말레이시아는 안워르 이브라힘 총리(H.E. Dato’ Seri Anwar Ibrahim)의 리더십 아래 2030년까지 고소득국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총리가 최근 발표한 제13차 말레이시아 계획(2026–2030)은 산업 고도화, 녹색 성장, 디지털화, 경쟁력 강화라는 네 축을 중심으로 지속 가능하고 포용적인 성장을 향한 로드맵을 제시한다. 개방성은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과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같은 다자경제체제를 통해 유지된다. 일본의 역할은 ‘기술이 현장과 만나는 곳’에 집중된다. 고효율 제조, AI·DX, 그리고 에너지 효율화가 그 핵심이다.
바다에서 연결되는 안보
정치와 경제의 지도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 안보 협력이다. 양국은 해양 상황 인식(MDA), 통신·합동훈련을 넓히고, 일본의 OSA(공적안보지원)를 통해 UAV·구조정 등 비살상 장비를 지원받았다. “결국 바다는 연결입니다.” 샤릴 에펜디 압둘 가니 대사의 말처럼,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이라는 원칙이 순찰·수색·구조라는 실무로 이어지고 있다.
더 푸르게, 더 넓게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지속가능성으로 이어진다. 말레이시아는 2050 넷제로를 약속했다. 일본 기업들은 태양광·바이오매스·수소에서 현지 생산과 기술 이전을 병행하고, 자동차 부문에서는 전동화(HEV·EV)가 속도를 낸다. 역내 차원에서는 AZEC(Asia Zero Emission Community)가 수소·CCS·효율 향상의 실험장을 제공한다. 경제와 환경,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잡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명료하다.
일상으로 스며든 교류
문화의 결은 더 부드럽다. “일본은 어릴 때부터 공동체 의식을 가르칩니다. 아이들이 교실을 스스로 청소하는 것처럼요.” 샤흐릴 에펜디 압둘 가니 대사는 ‘좋은 관행을 배우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실제로 말레이시아에서는 일본어 교육·교류(예: 문부과학성 장학제도)가 꾸준하고, 애니·만화·J‑POP이 청년층의 정서를 잇는다. 식탁에서도 변화는 뚜렷하다. 일본 농식품·가공식품 수입이 늘며 일본 음식점은 일상의 선택지가 되었다.
관광에서도 자연·미식·합리적 비용·따뜻한 환대라는 말레이시아의 강점이 통한다. 직항 노선 확대는 접근성을 높였고, 학교·대학과 연계한 에듀‑투어리즘도 성장 중이다.
한국으로 향하는 시선
대사는 한국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말레이시아와 한국의 관계는 매우 견고하며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많은 한국 기업들이 말레이시아를 동남아 진출의 허브로 삼고 있고, 학생 교류나 과학기술 협력도 점점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이어 말했다.
“양국은 혁신·지속가능성·문화 교류의 분야에서 서로에게 배우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큽니다. 말레이시아는 한국과의 협력을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정치의 장면, 품격의 언어
우리가 만난 날, 샤흐릴 에펜디 압둘 가니 대사는 “일본에서 여성 총리가 나올 가능성”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국제무역을 둘러싼 긴장에 대해서는“관세는 공정해야 합니다”라는 단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했다. 짧지만 단단한 어휘였다.
마지막으로 대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Visit Malaysia 2026에서 여러분들을 꼭 만나 뵙고 싶습니다.” 논스톱의 해는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나침반은 분명 사람과 현장, 포용성과 지속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진: 파이낸셜뉴스 재팬
인터뷰어: 송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