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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생각보다 간단했다” 을미사변 일원 서신 발견

을미사변(1895)’실행 그룹 일원이었던 일본 외교관이 명성황후(1851∼1895) 시해 다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서신이 발견됐다고 아사히신문이 16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 영사관보로 머물던 호리구치 구마이치(1865∼1945) 발송인으로 있는 편지에는우리가 왕비를 죽였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경위가 상세히 기록된 것으로 파악된다. 호리구치는 일본 외교관, 경찰, 민간인으로 구성된 을미사변 실행 그룹의 일원이었다. 그는1894 11 17일부터 사건 직후인 1895 10 18일까지 고향 니가타현의 친한 친구인 다케이시 데이쇼에게 서신을 보냈으며, 현재 발견된 것은 8통이다. 가운데 명성황후 시해 다음 날인 1895 10 9 편지에는 사건 현장에서 자신이 했던 행동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그는진입은 내가 담당하는 임무였다. 담을 넘어 (중략) 간신히 오쿠고텐(귀족 집의 안쪽에 있는 건물, 침소)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 밝혔다. 그러면서생각보다 간단해 오히려 매우 놀랐다소감까지 적었다.

서한은 나고야시에 거주하는 우표·인지 연구가 스티브 하세가와씨(77) 고물 시장에서 입수했으며,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 저자인 재일 역사학자 김문자 씨가 붓으로 흘려 문자를 판독했다. 아사히는 편지에 기재된 내용, 소인 등을 호리구치의 친필로 보인다고 전했다. 김문자씨는 아사히에현역 외교관이 임지에서 왕비 살해에 직접 관여했다고 알리는 문면(文面·편지에 적힌 문구, 표현에서 보이는 취지)에서 새삼 생생한 충격을 느꼈다.

아직도 불명확한 점이 많은 사건의 세부를 해명하는 열쇠가 되는 가치가 높은 자료라고 덧붙였다.

을미사변은 1895 10 8 일본 육군 출신 미우라 고로 당시 공사의 지휘로 일본 군인, 외교관등이 경복궁을 기습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태운 사건이다. 사건 다음 1 일본 육군 장교 8명은 군법회의에서 무죄로 결론이 났으며 미우라와 호리구치 48명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석방됐다.

파이낸셜뉴스 도쿄=조은효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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