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미국과 진행 중인 대규모 대미 투자 협상이 일본의 전례를 따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일본은 지난 9월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무역 합의에서 5500억 달러에 달하는 대미 투자를 약속하며 사실상 통제권 없는 자금 제공자로 전락했다. 한국도 3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펀드 조성 협상 과정에서 유사한 구조를 강요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9월4일 ‘미·일 간 기본 합의 이행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일본산 자동차에 대한 미국의 관세를 25%에서 15%로 인하하는 대가로, 일본은 5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핵심은 이 투자금의 실질적 운용권이 미국 측에 있다는 점이다. 투자처 결정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위원장으로 있는 투자위원회가 논의하며, 최종 결정은 트럼프가 내린다. 일본은 투자처에 대한 거부권은 물론, 위원회 참여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자금 조달 방식도 일방적이다. 일본은 펀드 법인의 자본금 1~2%를 출자하고, 나머지 98~99%는 자국 국책금융기관들이 대출 또는 보증 형식으로 조달한다. 만약 펀드가 실패하거나 손실을 기록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일본 측에 돌아간다. ‘비소구(non-recourse)’ 조건이 붙은 구조다. 펀드에 손실이 발생하면 일본은 원금을 돌려받지 못하며, 미국은 책임지지 않는다.
수익 배분도 문제다. 초기에는 미·일 양국이 50대 50으로 나누지만, 일정 시점 이후부터 미국의 몫은 90%로 올라간다. 투자처 기업이 일본산 중간재나 서비스를 구매하도록 ‘시도한다’는 문구가 있긴 하지만, 강제력이 없고 실익도 불투명하다. 더구나 트럼프 임기 내인 2029년 1월19일까지 전액 집행해야 한다는 조항도 있어 일본 측은 시간적 여유도 없는 상태다.
한국도 지난 7월 말 한·미 무역 합의와 8월25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관세 인하를 합의했으며, 현재까지도 구체적인 투자 조건을 미국 측과 협상 중이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9월9일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3500억 달러 펀드의 운용 방식에 대한 양해각서를 두고 수십 차례 협상이 진행됐다”고 밝혔다. 이는 일본의 사례와 유사한 구조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미국은 협상 와중인 9월4일 조지아주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 이민세관단속국(ICE)을 투입하며 압박 수위를 높이기도 했다. 이는 대미 투자의 조건을 더 유리하게 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해석된다.
문제는 규모다. 3500억 달러는 한국 GDP의 19%, 2025년 국가예산의 72%, 외환보유액의 85%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다. 이 자금이 일본처럼 미국의 단독 운용에 맡겨질 경우, 투자 실패에 따른 손실은 고스란히 한국이 떠안을 수밖에 없다. 수익 분배, 운용권 참여, 손실 책임 등 모든 측면에서 불리한 구조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국민적 감시와 국회의 견제가 필요한 시점이다.

